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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죄와 벌 >도끼 살인마가 된 청년

부엉개 2021. 8. 11. 16:35

도스토옙스키<죄와 벌>도끼 살인마가 된 청년

 

스포일러 주의!

 

재미가 있다, 없다. 이 단순한 기준은 무엇을 할 때나 굉장히 유용한 도구다. 책에도 당연히 적용된다.

 

시간도 잊고 흥미롭게 읽는 책은, 1. 자신이 모르던 자기 자신을 대거 보여주는 책일 것이다. 어쨌거나 완독한 책이라면 자기와 닮은 측면을 조금이나마 가진 책일 것이다. 소설의 경우 주인공한테서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죄와 벌’을 읽으며 주인공한테서 나를 발견했다. 젠장, 나도 살인마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인간인가.

 

 

 

 

 

내가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책 중에 가장 긴 장편이었다. 다른 것도 좋지만 특히 심리, 감정 묘사가 탁월하다.

 

죄와 벌은 가난한 명문대 생이 도끼로 노파와 한 여인을 찍어 죽인 뒤, 자수하기까지의 심리 변화를 장황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해 보이지만 계획 살인을 저지르고, 또 자수하기까지 주인공의 머릿속은 내내 진흙탕 속을 뒹군다. 라스콜니코프는 정신세계가 몹시 복잡한 청년이다. 아마 이런 사람이라면 이입이 잘 될 것이다.

 

이제는 이전 세대보다 정신적으로 복잡한 시대를 살아갈 것이므로, 이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면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그밖에도 여러 정신 질환이 폭증하는 걸 보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정신질환 역시 몸이 스스로 치유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화장실에서 읽은 소설을 마침내 덮었는데… 놀라우리만치 할 말이 없다. 오랫동안 읽어서인지, 아니면 꿀꿀한 이야기에서 빠져나와서인지는 몰라도 뭔가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너무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죄를 짓고 마음 편히 살지 못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곱씹는다. 자신의 죄가 죄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청년 라스콜니코프는 나폴레옹 같은 천재들이 사람을 죽이고도 승승장구한다는 사실과 자신도 그러한 사람일 거라는 믿음 때문에 마침내 살인을 저지른다. 특별한 사람이라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소수에게 피해를 입혀도 괜찮다는 논리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망상일지도 모른다. 분명 이러한 망상이 가져다주는 이득도 어딘가에는 있을 터. 하지만 그쪽으로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이러한 망상이 불러올 재앙 측면을 소설은 면밀히 서술한다.

 

청년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 자신이 악한이라고 판단한 이들을 이(蝨)라고 표현할 만큼 경멸한다. 두피를 기어 다니는 그 이!

 

과연 라스니콜니코프의 화는 어디서 온 걸까. 살아온 환경과 개인의 성격이 모두 다른 탓에, 누군가는 개개의 인간이 가진 가치가 동등함을 보다 빨리 깨우칠 테고, 누군가는 그보다 더딜 테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권리가 누구한테 있을까? 물론 범죄를 저질러 법망에 걸리는 경우라면 예외.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깊이 이해한다는 건,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병합되는 과정이다. 소설은 사랑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속이 상한다. 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이 더 강해져야만 하고, 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을 이해하는 입장이어야 하는지. 연인 소냐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아무튼 도스토옙스키의 책은 좀 더 보고 싶다. 다시 보고 싶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두운 분위기인데도 희한하게 소설 밖으로 나오면 세상이 훨씬 더 밝아지는 기분이다.

 

한편 그런 생각이 든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은 딱히 이렇다 할 깨달음이나 교훈 없이도 소설을 읽는 동안 별다른 생각 없이 집중하게 만든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값지다. 뭔가를 얻어야만 한다는 강박 없이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요즘이다. 천진한 어린아이에서 강박적인 어른이 되었다가, 강박을 해소하며 늙어가는 것이 우리네 삶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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