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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스토너>삶에서 결여된 아름다움의 실체

부엉개 2020. 5. 13. 22:44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이고 변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섬세하게 기록한 소설, 스토너. 한 문장으로 10년을 훌쩍 뛰어넘기도 하고, 1초도 안 걸릴 법한 짧은 생각을 한 페이지에 해부하듯 묘사하기도 한다. 나는 우리가 존 윌리엄스의 글처럼 현실이나 현재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몹시 불편한 순간은 1분이 한 시간 같고, 과거를 회상할 때는 10년이 눈 깜빡할 사이에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하물며 우리는 그러한 무수한 과거를 선택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놀라운 존재다.

 

시간은 허구다. 우리의 삶 또한 죽을 때까지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독자적인 작품이다.

 

 

 

 

 

스토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 들어갔고, 문학에 마음을 빼앗겼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아니었다.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워 부모의 일에 이바지하려던 스토너였지만, 학점을 채우기 위해 신청한 교양 수업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슬론 교수의 영문학 강의가 사슬에 묶여 있던 그의 영혼에 말을 걸었다.

 

스토너는 시간이 지날수록 문학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대학 생활을 통해 부모조차 타인임을 새로이 깨달았고,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차츰 더 선명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지만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슬론 교수의 추천으로 곧장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종신교수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첫사랑을 만나 결혼했고, 자식을 낳았다. 스토너의 삶에는 1, 2차 세계대전이 끼어 있다.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유일한 친구를 전쟁에 빼앗겼고, 전쟁이 사람들과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았다.

 

 

 

소설 ‘스토너’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다. 농부나 대학 교수라고 하면 흔히 어느 정도는 안다고 착각하게 마련이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이 그렇다.

 

스토너가 겪은 대학 교수의 삶이 내게는 낯설었다. 그의 첫사랑과 세속적인 주변인들을 보면서 익숙함과 향수를 느꼈다. 특히 농부인 부모와 자신이 동떨어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장면에서 느낀 전율을 한동안 떨쳐내기 어려웠다. 그 밖에도 소설은 몇 번의 충격을 더 선사해 주었다.

 

 

 

스토너의 첫사랑은 정서적인 장애가 있는 여자였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우울증과 같은 장애로 진단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아니었으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답답하다. 우리는 20세기에 비하면 감정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람들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나아진 덕분이다. 20세기 초반에 심리학과 부분적으로 대치되는 정신분석학이 생겨났다. 심리학이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에 더 집중한 학문이라면 정신분석학은 깊은 무의식을 탐구한다.

 

20세기 초에 태어난 스토너는 아내의 신경증과 히스테리 앞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았다. 아내의 이상한 행동은 딸을 낳고도 계속되었고, 딸에게도 큰 악영향을 끼친다. 스토너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내가 딸을 낳고, 그녀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한참 경험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토너의 첫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진 것이 사고였다면, 오히려 바람난 여자와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다. 나는 도덕적인 잣대를 내려놓고 둘의 연애를 바라봤다. 소설은 세상이라는 무대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뚫린 또 하나의 창이다. 이런 고마운 도구에 굳이 원래의 관점을 들이밀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되도록 원래의 창문에다 단단히 커튼을 치고 새로운 창을 통해서만 소설을 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거나, 상대방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감정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것이다. 나는 가족관계에서조차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었을 때, 안타깝게도 나의 가족은 침묵했다. 적극적으로 노력했지만 앙다문 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면 들어줄 여유가 없을 때는 자신들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고집했다. 이렇듯 삶은 엇갈림의 연속이다. 수많은 관계가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문학은 우리가 꺼리거나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예습하는 기능을 가졌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러한 감정들을 완벽하게 예습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던 경험이다.

 

 

 

스토너를 읽고, 여느 사람의 삶이 이토록 특별할 수 있다는 면에서 감동했다. 사실 현실에서 대학 교수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치고는 존재감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다른 허구 작품들과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평범한 스토너의 삶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작가의 훌륭한 문장과 꼼꼼함, 그리고 사소한 것에서 특별함을 보는 안목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의 미래나 과거를 살고 있지만 한 사람의 삶을 한데 그러모으면 하나같이 특별한 작품이 된다. 이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걸작이다. 매일 건물 위로 고개를 내미는 태양과 빛을 따라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반짝거리는 공기를 보라. 그 장면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볼 수 있다.

 

‘스토너’는, 존 윌리엄스는, 반짝거리는 공기의 아름다움을 차분하게 읊조린다. 성실하게, 집요하게, 때로는 강박적으로. 느끼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이 소설에 집착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바라지만 미처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욕망한다.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멈추라고, 당신 앞에 펼쳐진 진짜 삶을 보라고 소설은 말한다.

 

인생은 참으로 고되고 슬픈 이야기다. 하지만 슬픈 동시에 아름답다. 부디 당신의 인생에 결여된 아름다움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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