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로그
무라카미 하루키<1Q84>사랑+믿음=기적! 본문
‘1Q84’를 읽는 동안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내내 이 소설만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다른 책도 몇 권 읽고, 소설도 썼다. 힘든 시간과 평안한 시간을 나누어 보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읽어서 그런지 소설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지금껏 내가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세계관은 의식과 무의식 세계로 나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그랬고, ‘해변의 카프카’와 비교적 최신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도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의 숲’은 리얼리즘 소설로 내면의 성장을 다룬다지만, 껍데기만 다를 뿐 결국 소설이 가진 맥락은 비슷하다고 느꼈다. 작가의 스타일 같다. 이번에 읽은 ‘1Q84’ 역시.
‘1Q84’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조지 오웰의 ‘1984’ 오마주다. 소설 내에서 조지 오웰과 ‘1984’라는 작품을 대놓고 언급한다. 그밖에 안톤 체호프의 어록이나 ‘사할린 섬’이라는 저서도 등장한다. 소설에서 소설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소설가는 글 쓰는 일 외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읽기에 쏟아 붓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가들이 어릴 때 많은 양의 소설을 읽었으리라. 한 작가의 작품을 이렇게 여러 편 읽는 것은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나는 어떤 일이든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즐기다가도 진지한 일이 되어 버리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지하실 뚜껑을 열고 슬금슬금 올라온다. 소설 습작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글쓰기는 물론, 소설에 관한 행위라면 몽땅 싫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읽고, 쓴다. 살면서 배운 거라곤 집착뿐이라서. 좋게 말하면 인내. 이번만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은 어떤 까닭인지는 잘 몰라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살짝 넘어버린 존재들 같다.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원한다고 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몇 권을 읽으며 자연스레 무라카미 작가도 그랬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1Q84’의 세계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도 닮았고, 영화 매트릭스와도 닮았다. 하지만 독자적인 세계다.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친절하게도 입구와 출구가 있다. 주인공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구를 들어가 오랫동안 헤맨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겪는 모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세계와도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할 것만 같았다. 살짝은 뒤틀린 세상에.
1Q84의 주제를 한 가지로 압축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억지로 압축해 보자면 사랑과 믿음이다. 이 두 가지가 기적을 만들어낸다. 사랑과 믿음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을 때, 하루키는 하나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 그 세계 안에서 사랑과 믿음을 ‘새로이’ 정의한다. 다만, 세계를 소설의 범주에서 볼 때 너무 자세하게 옮겨놓는 바람에 분량이 퍽 길어졌다. 개인적으로는 괜찮았지만 사람에 따라 지루함을 느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소설 ‘1Q84’의 세계는 우리가 밟고 있는 이곳과 닮은 점이 무척 많다. 아니, 대부분 닮았다. 틀린 그림 찾기에서처럼 일부가 다를 뿐이다. 오히려 우리가 몸담은 ‘현실’이라는 세계의 이상한 점을 바로잡은 공간일지도 모른다. 우리 쪽에서는 현실 운운하며 괴팍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으니까. 하루키는 자기 입으로 환상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만 그가 만든 세계는 몇몇 장치만 손보면 우리의 세계, 즉 현실과 똑 닮은 세계다. 우리는 그의 소설 안에서 어떤 종류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현실과 빼닮은 소설 세계에서의 희망이라면, 아마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세상으로 그것을 옮겨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의 일부도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