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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책

내 이름은 빨강: 우리의 기억은 무엇을 뜻할까

부엉개 2019. 5. 4. 16:40

설레는 가슴을 안고 책을 펼쳤다. 읽다 보니 잘 구성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스만제국의 세밀화가 이야기였다. 오스만제국? 중학교 수업 시간에 들었던 기억이다. 한편 러브스토리와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추리 소설적 측면도 있었다.

 

특이한 점은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며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액자 형 구성으로 딸린 이야기가 많다. 표면적으로 흘러가는 스토리라인과는 별개로 여느 훌륭한 소설이 그렇듯, 내부의 보이지 않는 줄기도 느껴졌다.

 

평소 소설만은 일부러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하는데, 이 소설은 따로 노력이 필요 없었다. 읽히는 게 너무 더뎌서 읽기 능력을 의심할 정도였다. 중간에 시험 삼아 아껴두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펼쳤는데 내 능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단순히 어려운 소설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소설에서 지어낸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면 무의식적으로 소설을 밀어내게 된다. 물론 모든 소설은 허구라는 산소통을 등에 메고 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잘 구성된, 잘 쓰인, 깔끔한 소설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앞서 말한 지어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는 좀 까다롭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어감이 있지만 단순히 그런 의미만을 담은 말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구조적 세밀함, 혹은 견고함에 가깝다.

 

예컨대 리얼 빈티지, 즉 시간의 녹을 고스란히 먹은 것과 순전히 낡은 물건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함과 비슷하지 않을까. 소설에는 플롯이라는 말이 단짝처럼 따라다니는데, 이를 인과관계나 구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 이름은 빨강의 플롯이 너무 말끔해서 애초에 작가가 꼼꼼하게 구성한 대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가 싶다.

 

한편 내가 잘 모르는 소재를 다룬 소설이라서 어렵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터키의 낯선 인명, 지명과 유난히 많은 열거도 한몫 거들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독자로서 기대가 컸던 만큼 작은 실망감이 가슴을 채웠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세밀화가의 화풍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곧 기억하는 것이라네.”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화원장 오스만의 말이다. 그의 대사에서 그림이 곧 기억이라는 말이 예리한 통찰로 느껴졌다. 우리의 머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또한 복원한다. 기억은 필요와는 별개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무엇임에 틀림없다.

 

세밀화가의 삶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를 뜻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곧 기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억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중 하나라는 전제가 깔린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오르한 파묵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처럼, 소설은 오스만제국의 전통적인 화풍과 베네치아 화풍의 충돌, 즉 문화가 충돌하는 과정을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섬세하게 그린다. 문화의 충돌이라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이야기다.

 

그전에 읽은, 중국 소설가 모옌의 작품 개구리가 잇따라 떠올랐다. 종류는 다르지만 두 소설에는 실존했던 역사를 고발하는 측면이 있다. 때문에 세계사의 이해 여부도 소설에 재미를 더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다.

 

공교롭게도 두 소설 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에 속하는 책이고, 두 소설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 책은 전부 다 어려운가, 아니면 내 취향이 아닌가, 생각해 봐도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역대 수상자들의 작품 중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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