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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책

귄터 그라스_양철북: 작은 북치기의 전쟁 같은 삶

부엉개 2019. 4. 5. 21:35

내가 어떤 종류의 독후감을 쓸 수 있을지 더 명확해진 기분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우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우물. 소설가는 우물 안에 들어가 물을 떠 오는 사람이다. 귄터 그라스는 제법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온 듯했다. 너무 깊은 곳에서 떠다 나른 물은 얼음처럼 차가워서 좀처럼 마시기 어렵다. 양철북이 내게는 그랬다. 물의 참맛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소설마다 퍼 올린 물의 온도가 다르다. 소설을 고를 때는 자신의 체온과 비슷한 작품을 고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약간은 더 차가워도 괜찮겠지만. 나는 스스로 너무 과신해서 단번에 어려운 책을 펼쳐 들곤 했는데, 왜 그때마다 책을 덮어야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양철북이라는 깊은 우물물을 절반쯤은 다시 뱉어내며 마셨다. 후반부에 가서야 가까스로 물의 온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때로는 고통을 감수하면 더 큰 기쁨을 누리는 법이다. 하지만 흥미보다 인내심을 발휘한 독서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너무 자주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몸에 해롭다.


과거에 두 계절쯤 코딩을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 시각 장애인을 기준으로 웹사이트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좀 의아했다. 그들이 소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다수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보통 사람이 보기에 소수의 약자다. 물론 이것은 평범한 사람의 착각이다. 정작 오스카는 자신을 약자라 여기지 않는다. 책을 덮고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멀쩡한 몸을 빼면 내가 오스카보다 하등 나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상황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노력을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사람은 제각각 다른 환경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양철북을 읽은 한 달여간 나는 무엇을 얻었나. 약간의 인내심과 그 열매가 달다는 것. 작가의 기막힌 묘사력은 덤. 그중에도 의인화 능력은 정말이지 탁월했다. 


아장아장 걷는 오스카의 걸음을 따라 소설이 전개된다. 우리는 그저 천천히 뒤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1, 2차 세계대전의 무게가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한결 가벼워진다. 또 전쟁과 역사다. 둘 다 머리 아픈 소재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아무쪼록 생각을 고쳐먹으려고 노력 중이다. 전쟁을 인류의 뼈아픈 실수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는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전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가끔이라도 짜릿한 쾌감을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면, 이제는 잔잔한 기쁨을 매일 누리며 살고 싶다. 먼 곳을 바라보는 대신 더 가까이. 나를, 내 삶을 들여다보며 사랑하고 싶다. 나를 방치하고는 타인을 온전히 사랑하기 어렵다. 


오스카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다시금 내 삶으로 한 걸음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소소한 기쁨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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