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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_이방인, 보이지 않는 폭력

부엉개 2019. 2. 12. 14:09

“당신은 세상에 대해, 당신 자신에게 무심했으므로 사형을 선고합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서 한걸음 떨어져 사는 남자다. 한 사람의 무심함과 사회의 부조리가 얽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과거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도 읽었는데, 이방인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재미있는 소설이 좋다. 나를 재발견할 단서를 제공하는 소설. 그러려면 뭔가 쇼킹하고 다소 짜릿함도 필요하다. 어쨌거나 결국 ‘이방인’에 몰입하긴 했다. 처음에는 지루했지만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뫼르소와 친해졌고, 차츰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무심함에 가장 큰 분노를 느낀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어떤 형태로든 타인이 반응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행여 그것이 부정이라 하더라도. ‘무심’은 ‘부정’보다도 한결 열 받는 일인 것이다. 뫼르소는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면, 외부의 어떤 요구에도 무심하다. 그가 그런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소설에 전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유추할 수 있는 정도는 쓰여 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든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 여긴다.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 세계. 엄밀히 말하면 자연. 그것은 무심하게 작동한다. 막판에 뫼르소는 자신이 무심한 자연을 닮았다고 느끼며, 형제라 칭할 정도로 사랑하게 된다. 무릇 사람은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느끼며,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고 느낄 때 진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방인을 읽었는데, 정작 소설은 절반도 안 되고 논문과 해설 등이 절반 이상이었다. 소설을 읽고 충만해진 기분을 해설이 망치는 경우가 많다. 안 읽으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해설이 딸린 한, 자꾸만 시도하게 된다.


해설이 무엇인가. 어려운 글을 알기 쉽게 풀어 쓰는 것 아닌가. 나는 고전 소설의 장점 하나가 읽는 행위를 통해 독자와 책이 하나되는 과정이라 꼽는데, 애써 작가가 널리 읽히려 고심해서 쓴 소설에다 사족을 붙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답답한 해설자의 글은 자기만 고상해서 작가의 깊은 뜻을 이해한 것 마냥 써 놨다. 그런 글은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닌, 어휘력 자랑쯤으로 밖에는 안 보인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해설을 싸잡아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나쁜 해설’이 그렇다고 해야겠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떡하니 해설을 붙여 내놓을 정도면 여러 사람의 눈에 그 해설이 훌륭했다는 말인데, 나는 그 점이 더 놀랍고도 끔찍하다.


해설도 해설이기 이전에 글이다. 소설도 글이고. 목적은 서로 다르겠지만, 대중을 향한 글이라는 점은 같다. 적어도 대중을 겨냥했다면, 되도록 많은 사람과 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온당해 보인다. 불편한 글의 공통점은, 꼭 교수 님께 칭찬 받기 위해 쓴 글 같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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