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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직업으로서의 소설가」당신에게 즐거움이란

부엉개 2018. 5. 11. 05:14

원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했지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통해 작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서조차 제대로 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책에서 그런 부분을 충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책은 하루키 식으로 충실하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문득 어떤 작가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쉬운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민 끝에 얼마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신뢰, 그리고 재미.


작가와 독자 간의 신뢰는 실제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확실히 시간이라는 자양분이 필요한 열매와도 같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사람을 잠깐 속일 수 있을지 모르고, 또 일부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말을 적용할 수 있는 직업은 무진 많지만, 특히 작가에게는 치명적일 정도로 잘 적용되는 말이다. 어쨌든 작가라면 글로써 독자의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고, 오랜 시간 많은 독자를 상대해야만 한다. 35년이다. 한 인간의 삶으로 볼 때 거의 절반에 달하는 시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상대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무라카미 작가는 신뢰의 아이콘이 될 자격을 얻은 셈이다.


재미는 좀 다른 문제인데, 확실히 취향이라는 단어와 이웃사촌지간처럼 보인다. 무라카미 작가의 책, 특히 소설은 취향 저격이었다. 언젠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면 세계로 무게 중심이 옮아가 있었는데, 작가의 소설을 만난 것도 그 경계선 어디쯤이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조금 깊이, 내면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어떤 사건에 의해서, 이끌리듯.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작가의 소설 대부분은 하나같이 내면을 다룬다. 작가가 말하는 방식, 즉 문체 또한 아름답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마치 스타일과 인격을 두루 갖춘, 멋진 연상의 여인을 떠오르게 만든다.


사설이 길었는데, 슬슬 책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책 내용 중에서 가장 세차게 마음을 뒤흔든 이야기는 단연 '즐거움'에 관한 것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즐거움을 오해했구나!' 하는 생각이 스르륵,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전까지 즐거움이라는 어휘가 쾌락과 위로를 아무렇게나 휘저은 듯한 의미였다면, 책을 덮고 난 지금은 꿈과 평온, 기쁨을 정성스레 반죽한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는 극명하다. 전자는 유통기한이 매우 짧고 낙차가 심해 불안정한 데 반해, 후자는 안정적이고 자존감을 높이는 역할을 맡게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살면서 반드시 자신 만의 즐거움을 찾아 나서야 한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그 밖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환영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 우선 작가의 사적인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온다. 이게 웬 떡인가 싶을 정도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포함한, 한 인간으로서의 무라카미 상을 만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음악을 연주하듯 글을 쓴다는 감각, 리듬감. 나로서는 적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가 멋져 보이긴 했다. 작가는 그런 특출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본인을 평범하다, 혹은 어딘가 모자라다, 라고 일컫는 겸손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30년 넘게 사는 동안 좋아하는 일을 그대로 놓아두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선생님, 이제부터 무라카미 선생님이라고 불러야겠다. 돌이켜보면 '뭐가 됐든 지겨울 때까지 파고든다' 라는 게 나의 크나큰 문제였다. 아마 대한민국 하늘 아래 사는 많은 남자들이 나와 비슷할 거라고,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 경계가 흐릿해진 것도 얼마 안 된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지금을 사는 우리는 모두 피해자다. 기회가 된다면 여러분도 무라카미 선생의 도움을 받아 뒷걸음질 치는 방법을 좀 배워 보면 어떨까 싶다. 


최근 들어 지루하고 답답한 느낌이 자주 찾아왔었다. 지루함과 답답함이 어느새 분노로 바뀌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몸부림치다 밖으로 뛰쳐 나가길 반복했다. 뭐, 그런 게 삶이라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힘든 시기에 우연히 만난 책이라 더 절실하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몇 번의 우연을 경험하고 나면, 신이라는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상상도 못할 만큼 치밀한 존재일 거라고. 하지만 왠지 좀 치사한 구석도 있는 분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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