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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책

박완서, 두부: 한 사람이 살다 간 흔적

부엉개 2018. 2. 8. 00:30

모처럼 우리나라 소설가가 쓴 책, 산문을 읽고 기분이 좋았다. 나와 얼마간 마음이 통하는 작가가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사실 좋다는 흔한 말로는 부족하지만, 그 외에 칭찬을 더해 본들 사족이 될 것 같다. 아껴가며 읽은 책이었다.


겉 표지가 두부 모양으로, 책이 꼭 한 모의 두부를 연상시켜 정겹다. 책을 읽을 때면 겉표지를 벗겨 놓고 읽는데, <두부>의 겉표지를 벗기니 오돌토돌한 종이가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코를 들이대고 숨을 들이켰더니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완서 선생님. 연세 지긋하신 분이 쓴 글이지만 풋풋한 소녀 감성이 묻어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집안 얘기도 많이 나오고, 본인의 엉뚱한 생각과 사상도 제법 드러나 있다. 다른 세대를 살고 있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물며 생전에 얼굴 한 번 마주치지 못한 사람인데.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독립. 그리고 6.25전쟁(한국전쟁), 휴전을 차례로 겪었다. 전쟁에 대한 그녀의 심경을 차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괜히 울화가 치밀고 가슴이 먹먹할 때가 있었다. 소설을 왜 쓰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전시를 보냈는지, 생을 살았는지. 자신에게 어떤 상처가 있는가 하는 것도 언급한다. 깊은 상처를 소설에 희석함으로써 견뎌냈다라는 말에 코가 시큰해졌다.


박완서 선생이 쓴 글을 읽으며 마치 지금도 그녀가 살아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소설가는 천년을 산다. 그보다 좋은 소설가는 죽음도 무색하다. 나는 선생의 책을 읽으며 위로 받았으며, 친구가 되었다고 느꼈다. 가족들, 가까운 친구들조차 주지 못한 그것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건넸다. 인터넷에서 본 선생의 얼굴이 드문드문 떠오르며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물론 위로만 받은 건 아니다. 울적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순수'에 관한 이야기다. 산타가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던가? 나는 그랬던 적조차 없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한 때 나마 그랬던 시기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타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지금,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는 방법은 정말로 없는 걸까.


한자어가 많이 섞여있어 심통이 날 적도 있었다. 대충 알긴 알겠는데, 설명하라면 난감한 단어들. 그런 어휘가 적잖이 등장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은 한자어가 싫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녀가 살던 시대는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글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거의 한자어를 섞어 글을 썼다. 그리고 그래야만 위신이 선다고 여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의 혀와 글을 거세당할뻔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에 밴 고약한 습관들. 나조차도 부러 한자어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대통령의 '입장'을 대통령의 '처지'라고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은 든다. 글은 작가의 것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것이기도 해서 어려우면 안 된다. 일부러 어려운 표현을 쓰는 거만을 부리지 말아야겠다. 나는 아무리 좋고 위대한 글이라도 독자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뭐가 됐든 글이라면 항상 독자를 고려해야 한다.


1부 세 번째 장 '옛날'에서는 허무에 관해서도 말한다. 인생이 허망하다는 박완서 선생의 관점. 유독 그녀만의 관점은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내 나이 아직 마흔이 되기 전인데도 죽음에 관한, 삶에 대한 허무한 맛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미 고인이 된 박완서 선생은 오죽 했을까 싶다. 식민지, 전쟁, 핏줄을 잃은 설움까지 떠안고 살았는데. 할 수만 있다면 같은 이야기를 백 번이라도, 밤새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등을 어루만지며 괜찮다고, 나아 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눈곱만큼이나마 이해가 갈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나도 콱 죽고 싶다. 많은 이들이 그런 생각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게다. 사는 게 너무 버거운 것이다. 단순하게 먹고, 생활하고, 자고 하는 것조차 천근만근이다. 더 잘 버티는 류의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주변에는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도 있고, 비슷한 사람도 있다. 강함이 우쭐함이 되어서도, 거만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함은 약함을 보듬는 데 쓰여야 마땅하다.


정원을 가꾸는 일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완서 선생의 아버지도, 꼬마 박완서도, 헤르만 헤세의 아버지도, 꼬마 헤세도 정원을 가꿨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소설가는 역시나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직업이다. 선생의 그 많은 생각 중 어찌 죽음이 없었을까. 죽음은 노년의 선생에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찾아와 목을 죄려고 했을 것이다. 생이 저물어 갈수록 그 생각은 차츰 무겁게 사람을 짓누른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내용이지만, 박완서 선생의 말을 듣고 더 확고해졌다.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도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고 죽는다. 어쩌면 그래서 이다지도 긴 생을 살아 낼 수 있는 건지도.


선생은 표현의 자유를 무척 많이 누린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생각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그녀의 글을 읽음으로써 티끌만큼은 나아졌으리라 믿는다. 책을 읽는다면 누구라도 나아질 것이다.


선생은 2002 한일 월드컵 때, 축구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지구가 신이 찬 최초의 공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상상력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건지 궁금했다. 작가가 좋은 글을 쓰는 것을 채송화 씨앗이 땅속으로 침잠하여 뿌리내리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것에도 비유했다. 또한 고독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한다. 박완서 선생이 거의 혼자라고 느낄 만큼 고독해서 이토록 아름다운 글을 쓰는 거라면, 애잔하다. 그녀의 글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감상이 많이 나오는 것은 고독의 시간 동안 사소한 것들,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진 것들을 주의깊게 바라보아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작음, 보잘 것 없음에 관심을 갖는 일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머리로 생각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슴속에 반짝거리는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며 사랑으로 가꾼다. 씨앗이 꽃을 피울 즈음이면 우리의 눈앞에도 뭔가 새로운 것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중간쯤부터 해서는 시를 한 편씩 소개하고, 그녀의 글에 엮는 방식으로도 이야기가 진행되는 부분이 있다. 그녀의 삶에 시가 들어왔다는 말이 더 맞겠다. 아니면 선생이 시처럼 삶을 산 건지도. 선생을 보면 할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다 쏟아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정말이지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할 말이 별로 없어서 고민한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언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해서도 다룬다. 당시 일본군의 핍박 중에도 지하에서 고군분투했던 학자들의 노력으로 바퀴벌레처럼 살아 남은 우리 말과 글. 이런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 우리 한글은 배웠다는 말을 쓰지 않고, 깨우친다는 말을 쓴다.


우리 문학의 자부심, 그리고 외국 문학에 대한 동경. 그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말이 좋고, 글도 좋은데. 나는 왜 우리 문학에게 삐쳐 있는 걸까, 돌아본다. 어쩌면 내가 우리 문학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석의 저 혼자 고고한 느낌이 싫다. 본디 문학이란 나누어야 가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한국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뚤어져서인지는 몰라도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문학 같다고 느낄 적이 많았다. 좋아하는 외국 문학을 읽으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느끼는데, 왜 우리 문학에는 편을 가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선생은 박해 받아온 역사 때문에 한없이 우울해 질 수 있는 것이 우리 문학이라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상황도 유쾌하게 웃어 넘길 수 있는 해학. 그것을 가진 것도 우리 문학이라고. 그런 걸 보면 나는 너무 우리 문학의 우울함 만을 본 게 아니었나, 반성하게 된다. 아울러 우울한 배경에서도 해학을 잃지 않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목숨은 하나의 우주. 그만큼 값진 것이라고 선생은 말한다. 이런 기본적인 이념이 나와 통해서 그녀의 글을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밑바닥에 깔린 사상이 서로 다르면 글도 재미없게 마련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산문이든 어떤 글이 됐든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선생은 거짓을 밥 먹듯 일삼는 정치가가 싫다고 한다. 소설가라는 직업을 빗대어 거짓을 나라에서 허가받은 직업이라며 얼마간 창피함도 드러낸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소설,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가 허구일 지언정 그 안에 든 소설가의 마음은 진심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그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잘 짜여진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 밖에 없다. 사람들이 명화나 명작을 보며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는 게 바로 그런 이유다. 좋은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떤 지식적인 측면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역사에 끌린다. 산문 <두부>를 읽는 동안 문득 그 생각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조각난 역사는 여태껏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힌다. 그래도 고마운 점은 조각난 기억인데도 어찌저찌 맞아 들어간다는 점이다. 까맣게 잊을 줄로만 알았는데,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역사라면 까막눈인 나인데, 정작 어머니는 중학교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선생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문득 박완서 선생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서럽다. 다른 한 편으로는 언제든 책으로 만날 수 있어서 안심이 된다. 선생은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 '이 노릇'이라는 말을 쓴다. 그녀 답다. 그리고 그 노릇이 너무 힘든 일이란다. 많은 습작생들이 들으면 힘이 날 이야기다. 그들이 이 책을 알았으면 좋겠다.


하기싫은 일을 하지 않는 삶. 선생은 노년에 그런 삶을 살았다고 회상한다.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산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런 삶을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살았던 흔적, 혹은 그 이하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죽고 나면 흙으로 돌아가는 유기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책은, 필요한 어떤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나 거기에 있다.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는 감이 잡히는 것도 같은데, 뭐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다. 박완서 선생이 겪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똑같이 겪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유추할 수 있다. 언제 어느 시대든 사람이 사는 시기였던 것은 틀림없지만, 죽음의 위협이 더 가까이 도사리고 있던 시대는 생각만 해도 버겁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아픔, 한 사람의 상처를.


봄이 천천히 산을 오르고, 가을은 너무 빨리 산을 내려와 말리고 싶다는 선생. 집에서 내다 보이는 산의 색채를 보고 그녀가 느낀 심정이다. 봄도 살아 있고, 가을도 살아있다는 말인가. 내 눈에는 그런 게 보일 기미조차 없다. 그전에는 그 사실에 속이 상했지만, 지금은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이다, 생각하고 말란다. 계절이 계절을 밀어내는 흐름 속에 그녀가 살았다. 우리도 살고 있다.





 


글 읽는 걸 싫어하는 사람을 위한 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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