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로그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행복 계산에 실패한 헛똑똑이 동물 본문
먼저 독서에 관한 생각을 했다. 재미있는 점은 한 권의 책을 열 사람이 읽으면 열 가지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물론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야 있겠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분명 다르다.
<사피엔스>는 내게 몹시 어려운 책이었다. 소설만 고집하던 내게 인류 역사의 방대한 지도를 펼쳐 보이는 이 책은, 개인적인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눈을 반짝거리며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난생 듣도 보도 못한 용어와 역사적 사건들을 많이도 언급한다.
종속과목강문계,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 힘을 발휘했다. 망각하고 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사피엔스라는 명칭은 가장 하위 분류인 종에 속한다. 속은 호모, 종은 사피엔스. 우리도 여타 동물과 다를 것 없는 동물에 불과했다. 지금은 멸종한 다른 호모 속 동물과는 더 다를 게 없는 존재. 작가는 다른 호모 속 가운데 사피엔스만 가지고 있는 결정적 특질을 짚어 낸다. 상상력을 통한 대규모 협력. 바로 그것이 사피엔스가 다른 호모 속 종들과 달랐던 점이었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라고 했다.
이 책이 좋았던 점은 인류의 역사(객관적인 사실)를 토대로 우리가 사는 지금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문제들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경고도 한다.
책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기할 만한 점은 잠재 능력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에 곤히 잠들어 있는 추억, 활력, 설렘 등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평범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믿고 있다. 어쩌면 제 몸에 맞지도 않는 평범함의 틀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고 있다. 하지만 한 겹만 들추어도 '나는 특별한 존재야!' 혹은 '특별하고 싶어!' 와 같은 마음이 드러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평범하다는 것이야 말로 작가가 말하는 집단 상상력의 산물 중 하나 아닐까.
현대의 우리는 우리와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가령 요즘도 어디에서는 수렵채집인이 존재할 것이다. 그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행복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당신은 그들보다 행복한가? 나는 책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듯 느꼈다. 현재 나는 불행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육식을 당연시하는 현대사회를 꾸짖기도 한다. 육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고기가 좋아 스스로를 바바리안이라 칭하는 나는 소고기가 가장 좋고, 돼지고기, 닭고기, 다 좋아한다. 작가는 말한다. 돼지들도 우리와 똑같이 정서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연구 결과과 그렇단다. 종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우리에 갇혀 도축될 날만 기다리는 삶.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먹는 것이었다. 이렇듯 몰랐다면 좋았을 사실이 <사피엔스>에서는 곧잘 나온다.
문득 영화 <매트릭스>가 떠올랐다. 영화의 주인공인 네오는 빨간약을 먹고 현실을 직시할 것인지, 파란약을 먹고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사피엔스를 읽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선택해야 한다. 사피엔스를 읽고 현실을 직시할 것인지,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것인지.
수렵채집인, 그리고 농부. 작가는 둘의 삶을 자주 비교한다. 저자는 수렵채집인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농업혁명은 희대의 사기라고.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갈 것도 없이 지금도 형태만 달라졌을 뿐, 수렵채집인과 농부의 삶이 존재한다.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 것과 다를게 없는 삶을 산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을 마치면 퇴근한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농업혁명 때처럼. 옛날에 농부가 비축한 것이 식량이었다면 현대에는 그것이 돈인 것만 다르다. 안정적인 삶을 사는 현대의 농부들은 과연 행복한가. 그러면 그보다 불안정한 현대의 수렵채집인들은? 답은 아무도 모른다.
사회가 가족-국가 단위에서 개인-국가 단위로 쪼개지면서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인류는 새로운 병을 얻었다. 우울증. 그 원인을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따뜻한 시선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효율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를 낳았고, 개인주의는 이기심을 낳았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일부는 타인에게 이해 받으려다 지치고 상처받아, 종국에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우울증과 자살률이 치솟는 것의 직접적인 관계를 증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식으로 대강 유추는 되는 것 같다. 국가가 모든 것을 대신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국가는 기계와 비슷한 면이 많다. 개인에게 따뜻한 시선보다는 얼마간의 안락함만 줄 수 있는 것 같다. 더 문제는 그런 안락함이 곧 행복이라고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우리의 뇌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세뇌당한 것들을 떠올려보자. 돈의 필요성, 아침형 인간, 출퇴근, 결혼, 육아, 효도, 안정적인 삶 등등 셀 수도 없이 많다. 열거하고 보니 세뇌가 그저 나빠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밟고 사회가 원하는 어른이 되려면 '왜?' 라는 질문은 시간만 잡아먹는 방해꾼이다. 그렇게 정규 교육을 받고, 많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는 동안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망각하게 된다.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랬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인간의 창의성이 본능에 가까운 요소라 효율만 생각하며 기계처럼 살다보면 몸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너! 자꾸 이러면 나 죽어 버린다?' 몸이 정신에게 소리친다. 우리의 몸은 소처럼 부지런히 일하고, 노예처럼 정신의 말을 어길 수도 없지만, 그것도 한계치는 분명히 있다. '이건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직감이 든다면, 그걸 믿는 게 좋다.
'이건 아닌데?' 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답답함도 함께 찾아왔다. 어떤 새로운 생각을 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느낌. 분명 생각에는 질량이 없는데, 갇혀있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만 어렴풋이 존재하고 있던 가상의 울타리는 내 스스로 만든 인식들이었다.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삶에서 오는. 지금은 다행히 울타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인식의 울타리의 실체는 가둬두기 위한 것만이 아닌,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상상의 질서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앞서 말한 상상력을 통한 협력과도 같은 말이다. 사피엔스만이 가능하다는 허구를 말하고, 그것을 믿는 힘. 현대를 이루고 있는 주요 개념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기독교와 같은 종교도 그러하고, 자본주의도 그렇다. 다른 동물들 처지에서 보면 참으로 웃긴 일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무언가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하물며 그것은 먹지도 못한다. 생각에 따라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것. 동물들 눈에는 사피엔스가 대규모 정신이상 집단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러 신을 믿는 다신교, 하나의 절대 신 만을 믿는 일신교(기독교가 대표적)처럼 자본주의도 일종의 종교라고 말한다. 나는 그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너 죽을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래?" 물었을 때, 신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외치며 목숨을 내놓을 것이다. 이런 게 종교라고 생각한다. 똑같이 자본주의자에게 "너 죽을래? 자본주의를 부정할래?" 물으면 어떻게 될까. 작가가 말한 종교라는 개념의 뉘앙스는 사람들의 인식에 깊이 뿌리내린 개념 정도로 이해한다면 좋겠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과학에 접근하면 할수록 종교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라. 내로라하는 지식인들과 하물며 과학자들 가운데도 독실한 종교인들이 많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따금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가 있다. 물론 주관적인 것이고, 무지에서 오는 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종교는 꾸준하게 한사람, 한사람에게 스며든다. 나는 10년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여전히 기독교 절대신인 하나님을 100% 믿지 않는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책에서 작가가 말하는 재미있는 사실이 많은데, 그 중에는 과학에 관련한 이야기도 있다. 과학의 어원을 따져보면 라틴어로 '아무 것도 모른다' 라고 한다. 과학을 풀어 말하면 관찰을 선행하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이라고 한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은 크게 네 장으로 나뉘어 있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 통합, 과학혁명. 내게 지루했던 부분은 인류의 통합 중간부터 과학혁명 초반까지였다. 아무리 흥미로운 책이라도 지루한 부분은 있게 마련이다. 아마 사람의 관심사가 모두 달라서 그런 것 같다. 하물며 소설도 책 한 권이 몽땅 흥미롭기는 어렵다.
지루한 부분이 왜 지루한지 생각해 보니, 사실 우리의 관심사는 돈 그리고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이런 건데 너무 본질적인 문제를 들먹거려서 지루했던 것 같다. 현실, 그러니까 지금의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많다. 따지고 들자면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눈앞에 닥친 문제 만으로도 벅차다.
현대에는 흔히 존재하는 '신용'이라는 단어처럼 당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신용을 풀어 말하면 한 사람에게 다가 올 미래에 관한 가상화폐 같은 것이란다. 이것은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별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은행에 가서 대출 상담을 하면 우선 사업자인지 직장인인지,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묻는다. 당장 압류할 재산이 있거나 노예계약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희망적인 미래는 개뿔.
자본주의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낀 시기가 있었다. 다들 돈, 돈, 하는 게 못마땅했다. 물질적인 삶과 멀어지고 싶어서 그런 노력을 5년 쯤 한 것 같다. 소비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물건은 다 싸서 갖다 버렸다. 물론 나중에 가서 후회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공기를 마시며 산소를 부정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해, 돈에 관해 더 똑바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가진 커다란 장점이다. 나 같이 역사에 무지렁이인 독자에게는 아주 속 시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사피엔스>는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그전까지 파편적인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수줍은 지식에 불과했다. 지금껏 인류의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또 이렇게 알고 나니 가슴 속에 있던 응어리 하나가 사라진 것 같다.
인류의 기원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충분히 그랬다. 하지만 지금껏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대부분의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변수 때문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면서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현시대는 개인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큰 것처럼 느껴지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작아진 걸 수도 있다. 국가의 힘이 몇 배로 더 커졌기 때문이려나. 어쨌거나 실제로 역사의 주축을 이룬 것은 어떤 개념을 광신하는 상위 엘리트에 의해서였다고 생각하니 몹시 떨떠름하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젠장.
크게 공감했던 부분이 있다. 사피엔스는 협력을 통해 더 큰 능력을 얻는 데는 유능하지만, 그에 비례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무능하다, 는 것이다. 작가의 우려처럼 훗날 사피엔스를 멸종시키고 '초인간' 과 같은 새로운 종이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 종은 협력을 통한 발전 그리고 행복까지도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종이 아닐까? 아니면 평등의 개념 자체가 바뀌어 버릴지도.
내가 끝까지 읽은 책의 공통점은 '좋다' 이다. 좋지 않으면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흥미나 재미가 없는 책은 도무지 끝까지 읽을 재간이 없다.
<사피엔스>는 당연히 끝까지 다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