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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불후의 명화를 통한 기묘한 모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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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불후의 명화를 통한 기묘한 모험!

부엉개 2018. 1. 15. 13:36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좋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는 동안 더 좋아진 것 같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 문장을 보며 방대한 어휘력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를 돕는 많은 인력을 떠올렸다. 세계적인 작가인 하루키를 옆에서 서포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정보원들부터 해서 교열자, 편집자. 그리고 친구들. 어쨌거나 글을 읽으며 연신 대단한 소설가라는 생각을 했다.


<1Q84>도 그랬지만, <기사단장 죽이기>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좋지 않은 평을 늘어 놓는 사람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의견이 지배적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가 재미있었다. 즐겼다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의 소설에는 대중성도 가미되어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내면으로의 탐구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장(에피소드)이나 몇 장씩 읽어 나갔다. 이야기마다 하나의 소제목으로 꾸려져 있다. 마치 선물 꾸러미처럼. 소제목은 본문에서 등장하는 문장을 따왔다. 기억나는 부분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주인공의 나이가 36세라는 점. 특이하게도 나도 36세 때부터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기 시작했다. 읽는 동안 37세가 되었지만. 


하루키가 즐겨 쓰는 단어들도 눈에 들어왔다. 예의, 공정하게, 착실하게, 부지런하게, 성실하게, 시간을 들여, 공을 들여, 정성 들여, 묵묵하게, 와 같은 단어. 떠올려보니 그전 소설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했던 단어 같았다. 누구나 좋아하는 단어는 있게 마련이다. 하루키도 그런 가보다.


그전에 읽었던 하루키 소설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정도가 있는데, 확실히 그전 소설과 비슷한 양상을 띠는 부분이 많긴 했다. 무의식을 탐험하는 부분과 성(性)적 이야기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육체를 벗어난 정사가 등장한다는 점도 어찌보면 동일하다.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돌이 다른 세계와의 연결고리라는 점이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그림으로 바뀌었다는 점도 있다. 혹은 구덩이. 그렇지만 그런 부분조차 비교하는 맛이 있구나, 하며 읽을 수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만큼 작가의 묘사가 좋았던 것 같다. 풍경, 공간, 등장인물의 옷차림에 대한 묘사도 여전히 세밀했다.


여담으로, 요즘 등단하는 작가들의 단편을 보면 너무 묘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사상, 관념쪽으로 치우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심사위원들이 훌륭하다고 뽑아 놓았으니 할 말은 없다. 그건 그들의 세계이니까. 그래도 순수문학이 독자들과 닿아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려면 소설적인 최소한의 기능, 즉 묘사와 같은 부분들이 무시되면 안 될 것 같다. 


소설이 개인의 삶을 크게 바꾸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작은 힌트는 주는 것 같다. 각자 내면 깊은 곳이라면 존재할 무언가와 교신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것. 기사단장 죽이기도 그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어느 정도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런 종류의 경험이 적어도 한 번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종반부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지식은 전해줄 수 있지만, 지혜는 전해줄 수 없다." 지혜를 입 밖으로 꺼내면 바보 같은 말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 대목에서 정말로 공감했었다. 어쩌면 소설은 말보다는 조금 더 나은, 효과적인 도구일지도 모른다.


아래는 마음에 들었던 <기사단장 죽이기> 속 문장들이다.

"진실이 때때로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고통을 가져오는지."

-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닮았다면 거의 닮은 것 같고, 닮지 않았다면 하나도 닮지 않은 것 같다. 비슷하다면 거의 비슷하고, 다르다면 생판 다른."

- 꽤 흥미로운 표현이었다.


"자연스러운 미소가 새벽녘 달처럼 조심스럽게 입가에 떠올라 있다."

- 무척 마음에 들어 가슴에 남았던 직유.


"나를 이해해야 해요?" 마리에가 물었다.

"인물을 그린다는 건 상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언어 대신 선이나 형태, 색을 쓰는 거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마리에가 말했다.

"나도 그래." 내가 동의 했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거야."

- 주인공이 삶을 이해하는 방법. 무척 공감이 많이 갔던 부분. 어쩌면 아주 짧은 문장으로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 것 같다. 어쩌면 삶이라는 게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전부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나를 이해해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하나의 삶은 하나의 자아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빼앗아 가는 게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가져다 주는 게 있어. 중요한 건 시간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일이야."

- 기사단장의 대사. 위로가 되는 문장이었다.


멘시키는 그제야 아키가와 마리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 눈은 그녀의 얼굴 주위 어딘가 정착할만한 곳을 찾으려고 정신사나운 겨울 파리처럼 바삐 움직였다. 결국 그런 곳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 안절부절 못하는 시선을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컵에는 물이 16분의 1이나 남아있어."

- 주인공과 아마다 마사히코의 대화 중에서 주인공의 말. 주인공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마음을 날카롭게 벼려두는 걸세."

- 기사단장의 대사. 머리에 박히는 표현이었다.






그동안 하루키 소설에서는 음악 이야기도 끊이지 않고 나왔었는데, 처음으로 그가 이야기한 음악을 틀어놓고 소설을 읽기도 했다. 슈베르트 현악 4중주. 꽤 색다른 느낌이었다(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읽는 느낌이). 아, 하루키는 이런 음악을 듣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소설에서 나온 음악이긴 하지만 소설에서 써먹는 걸 보면 아마 즐겨 들었으리라. 확실히 대중가요가 집중력을 저하하는 반면 클래식은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기사단장 죽이기>의 어떤 문장(아마도 중요한 문장)에는 윗점, 글자 위에 점이 찍혀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문장은 더 집중해서 읽게 되더라.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읽었는데 나중에는 은근 방해가 됐던 것 같다. 너무 과하게 친절한 탓에 성가신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소설은 사람이 혼자가 되면 얼마나 외로운가 하는 문제도 거론한다. 하지만 그때가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때라는 것도 말해 준다. 실제로 삶이 우리에게 그런 시간을 많이 제공하지는 않는다. 소설을 통해 힌트를 얻으면 그 시간이 왔을 때, 더 지혜롭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평소에 종종 하던 생각인데, 주인공이 그 말을 해서 반가웠다. 이럴 때 소설이 참 재미있어지는 것 같다.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많은 위로를 받게 된다.


전설적인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비밀을 갖고 살아간다. 적어도 하나 정도는. 어마어마한 비밀까지는 아니더라도, 굳이 주변 사람이나 세상에 알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서 반드시 뭔가를 깨닫는다. 꽤 오랫동안 내 생각을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잖이 섭섭했다. 가족들, 가까운 친구들.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한 섭리다.


육체에 갇히다. 그런 생각도 해보게 만들었다.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 누구는 뛰어난 육체를, 또 누구는 불편한 육체를. 하지만 세상을 떠날 때 두고가야 한다는 점은 모두 같다. 그러면서 자연히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죽음을 목전에 두면 어떤 생각이 들까. 과연 덤덤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까마귀의 등장.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아예 까마귀 소년이 등장한다. 아마 하루키는 까마귀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풍경을 묘사할 때도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까마귀이다. 그게 무슨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까 생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까마귀는 자주 등장한다.


지루함을 잘 느끼는 나는, 도돌이표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당연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과연 그런 삶이라는 게 있을까 싶다. 우리는 반복하며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어떤 중요한 진실을 깨닫곤 한다.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그 삶 자체를 사랑하느냐 마느냐도 물론. 그 비슷한 이야기가 소설에서도 나온다.


소설은 당장 구체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한 예로, 하루키는 소설에서 음악이라는 소재를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나는 음악을 듣지 않게 된지 오래다. 어지럽다고 해야 할까. 언젠가부터 음악이 머릿속을 흐트러 놓는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다 문득 클래식 음악을 찾아서 틀게 되었다. 슈베르트 현악 4중주를 비롯한 기사단장 죽이기에 나온 여러 음악들. 지금껏 소설을 읽으며 자의로 음악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단순히 보기에는 그저 소설을 읽으며 음악을 튼 것이지만, 내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음악을 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라나 마침내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내 머릿속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볕을 내리쬔 것이다. 이렇듯 천천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게 소설의 힘이 아닐까.


개인에게는 각자에 걸맞는 위기가 찾아 오게 마련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주인공과 아키카와 마리에에게 각각의 맞춤형 시련이 닥친다. 그들이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실제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초등학생에게는 초등학생에게 걸맞는 시련이 찾아온다. 어린시절, 몇 날 며칠 고민했던 문제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정말로 귀여운 고민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것처럼. 나아가 노인이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자. 지금 하는 머리 아픈 고민들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까.


뭔가 중구난방 리뷰가 된 것 같아요 ㅜ. 또 어떤 얘기를 꺼내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에둘러 가다가 더 이상해져 버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결론은 꽤 긴 중구난방 글이 완성 되었어요. 하하. 다음에는 더 완성도 있고, 짧은 리뷰로 찾아 뵙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로 들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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